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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예상하지 마시라, 너무 빨리 총을 뽑지 마시라! '핏빛 카타르시스'라는 포스터 문구 덕분에, 자칫 폭력미학의 대가 샘 페킨파를 떠올릴 수도 없다.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주장하는 매우 도발적인 영화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철암계곡의 혈투>는 복수극의 잔인함만을 내세우는 헤모글로빈 자극제는 아니다. 지하진 감독이 적극적으로 마카로니 웨스턴을 표방하고 있긴 하지만, 이 영화에 웨스턴만의 숨결이 흐르는 것은 아니다. 미드의 속도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철암계곡의 혈투>는 너무 뻔뻔하게 느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느릿함과 나른함은 이 영화의 독특한 미덕이다. 만일 이 영화를 B급 웨스턴이라고 칭한다면 그건 스토리 때문이 아니라, 이 영화를 감싸는 이상한 기운과 현실과 동떨어진 속도 때문이다. 이 영화를 서부극이라는 고정된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새로움보다는 컨벤션이 더 많은 영화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웨스턴 스타일을 폭넓게 확장하고 실험하는 무대라고 가정을 한다면 <철암계곡의 혈투>는 할리우드 장르 영화들의 속성을 모조리 녹여낸 용광로에 가깝다. 따라서 주인공 철기(이무생)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모습에서 웨스턴보다는 <와일드 원>의 말론 브란도를 연상시킬 수도 있다. 혹자는 느와르의 비정함을 느낄 수도 있다.

 

 


지하진 감독은 자신만의 모험 속에서 "영화를 제대로 맛 봤다"고 고백한다. 이 실험이 아직은 관객들과 큰 접점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가 사랑하는 웨스턴, 스릴러, 호러라는 장르들이 지금의 관객들에게 아주 익숙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철암계곡의 혈투>을 보면, 그의 다음 작품이 더욱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즉 "영화와 함께 성장해 가고 싶다"는 지하진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다. 지하진의 야심과 그의 영화는 1960, 70년대 이탈리아 웨스턴을 표방하고 있지만,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새로운 미래로 나가기 위한 신호처럼 보인다. 일단 오늘은 <철암계곡의 혈투>라는 영화적 유산을 즐겨 보자!



싸움에도 매너가 있다

 

 

 


Q. <철암계곡의 혈투> 포스터에서 '정의 따윈 필요 없다'는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직접 낸 아이디어인가?

배급사 인디스토리 팀장님의 아이디어다. 저 문구, 난 좋다. 강렬해서 마음에 든다. 사실 난 영화에선 정의를 추구했다. (웃음)


Q. 잔혹 서부극을 내세워서 피가 넘치고 끈적거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착했다. 또 쿨한 느낌도 있다.

심지어 귀엽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다!


Q. 악당들과 싸우는 부분들이 혈투보다는 대결(진검승부)에 가까웠다.

나름의 존중도 있다. 어쨌든 그건 싸움의 매너다.


Q. 매너라고 하니까, 홍콩 무협영화들이 떠오른다. 고수끼리 싸울 때 보면 무슨 권법을 쓰는지 미리 서로 가르쳐 주고 대결한다. 그런 느낌이다. 

그런 거 맞다. <흑사회> 같은 두기봉 영화를 좋아한다. 악당들끼리의 싸움이 으레 그렇다. 누구 가족 모임에 하는데 찾아가서, 피크닉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심지어 아이들한테 인사도 한다. 그러고는 나중에 전부 다 죽인다.


Q. 원한이 뼈에 사무친 걸 고려하면 빨리 악당 귀면(윤상화)을 제거해야 하는데, 주인공 철기(이무생)는 다녀오라고 귀면의 상황까지 고려해준다. 서로 룰을 지키는 건가?

철기가 확신을 하는 거다. 어차피 그는 죽을 것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마지막 결투만 남은 거다. 그에게 별로 옵션이 없다는 것을 아니까, 기다릴 수 있는 거다.

 

 

 


Q.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배우보다 사실 '강원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카로니 웨스턴을 표방한 영화이기 때문에, 도시에서 싸우면 맛이 나질 않는다. 자칫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강원도를 선택함으로써 '그럴싸한' 현실의 느낌을 만들어냈다. 한마디로 로케이션의 힘이 돋보였다.

그렇게 봐 주셔서 감사하다. 일단 속도감의 문제가 있었다. 말씀하신 것처럼 쿨하고 황량한 분위기도 중요했다. 이 도시로 들어가는 순간, 모든 속도가 느려지는 느낌을 원했다. 


Q. 느슨하고 나른했다. 그런 슬로 템포의 느낌은 잘 살아있다.

이 영화는 내가 제작(Spinach N Bean)을 했으니 가능했다. 현대 액션물인데다, 만약 상업영화였다면 이런 속도감은 누구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Q. 사실 그런 느린 템포 때문에 보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의도한 것이라 다행이다. 

약간 허탈 수준의 웃음을 원했다. 이 영화 자체가 보편적으로는 웃음의 요소가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 영화를 계속 볼 때마다 난 자주 웃었다. 캐릭터들을 보면 화석화된 느낌을 받는다. 악당의 경우, 예전에는 잘 나갔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완전 퇴물들이다. 어떻게 보면 그 당시에 단죄되어야 극적이었을 텐데, 그들은 완전 해묵어서 철기를 기억하지도 못한다. 주인공 철기도 어렸을 때의 격한 감정은 완전히 퇴화되고, 남은 것은 복수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밖에 없다. 그런 느낌이 살기를 원해서 공간도 고립되기를 원했다. 바로 그런 정서다.



태백에서 꼭 상영 했으면 좋겠다


Q. 강원도는 원래 잘 알던 곳인가?

아니다. 거의 다 처음 가 본 곳이다. 세르지오 레오네가 스페인에서 영화를 많이 찍었다고 알고 있다. 이탈리아 치네치타('영화 도시'라는 뜻으로, 로마에 있는 영화 촬영 스튜디오) 같은 곳. 정작 무대가 텍사스는 아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도시와 동떨어져 있는데, 그 지역 전체가 개발 때문에 현대사 내내 진통을 앓고 있는 곳이 어디일까, 정석으로 생각을 했다. 자연이 남아있는데 개발의 진통을 겪은 곳. 그래서 강원도와 제주도를 떠올렸다. 제주도에는 말이 있으니 촬영은 가능하지만, 그걸 컨트롤 할 능력이 내겐 없었다. 그래서 탄광을 선택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이 "강원도에서 왜 웨스턴을 찍었냐?"는 질문을 많이 하신다.


Q. 사실 강원도에 갇혀야 배우들도 어딜 못 가고 영화만 찍는다.(웃음) 독립영화의 현장을 좀 알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맞다. 제주도는 비행기를 많이 타야 해서 제작비가 많이 든다. 제주도로 했으면 큰일 날 뻔 했다. 난 배우들과 전부 함께 갔다가 다시 모두 돌아오는 걸 생각했는데, 수십 명이 영화 찍는 동안 계속 왔다 갔다 했다. 강원도라서 이동이 불편한 건 맞다. 재미있는 건, 가야 할 배우가 촬영을 나갔다 돌아와 보면 숙소에 있더라. 무술팀도 분명히 간다고 했는데, 계속 있었다.(웃음)


Q. 촬영무대인 탄광은 지금 운영이 되고 있나?

전부 폐광이다. 그런데 신기하게 탄광을 운영하고 있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가스를 배출하기 위해서 그러는 건지. 공장 자체는 돌아가고 있다. 관리하는 사람도 있었다. 최후의 결투를 하는 석탄산에서 찍은 장면이 좀 많다. 그 지역 깡패로 나오는 학봉(오용)이랑 싸우는 장면도 여기서 찍었는데, 이곳은 2008년에 폐광이 됐다. 그 석탄산 같은 경우는 지금은 허브 농장이 됐다. 도끼(곽자형)가 죽는 장소는 5년 전부터 개발을 한다고 해서 말이 많은 곳이다. 그 지역 전체를 예술인들을 위한 타운처럼 조성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거의 마지막으로 그곳을 찍은 영화다. 이 영화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 지역의 기록으로 남을 것 같다. <차우>도 여기에서 찍긴 했지만, 상업영화이다 보니 세트와 섞어서 만들었을 거다. 그게 일반적이다. 이 영화의 경우는 그와 달리, 장소를 있는 그대로 많이 활용했다. 약간 기록영화처럼 된 것도 맞다. 그 장소의 의미에서 보자면.


Q. 혹시 허가가 어렵지 않았나?

생각보다 쉬웠다. 우리 영화 제작팀에 연출부가 한 명도 없었다.


Q. 그건 예산 때문에 그런 건가? 그래도 연출부가 없다는 건 처음 듣는 소리다.

예산 때문에 그런 것도 있다. 조연출이 있었다면 좋았을 수도 있다. 난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십 분짜리 영화학교>라는 책을 보고 <철암계곡의 혈투>를 만들 생각을 했다. 사실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다. 스탭이 없을수록 영화의 진행은 빠르다고. 학생 때는 단편만 찍어도 연출부 3명은 있었다. 결국 막판에 너무 힘들어서, 절친한 윤기형 프로듀서(<페이스 메이커>)에게 도움을 청했다. 본인은 현장에 못 오지만, 본인이 아주 아끼는 두 사람을 영화에 투입을 시켜줬다. 그분들이 워낙 능력자라 섭외를 잘해 주셨다. 영화는 항상 섭외를 한 후, 그 관리가 중요하다. 하루 촬영하고 나면 다시 오지 말라고 하는 일이 속출한다. 제작진들이 워낙 관리를 잘 해주셨다. 생각보다 시에서 지원을 많이 해주셨다. 아무런 조건 없이. 도와달라고 요청을 하면 잘 도와주셨다.


Q. 그렇다면 그곳에서 특별 상영하면 어떨까?

다른 곳은 몰라도 태백에서는 꼭 상영을 하고 싶다.


Q. 특히 석탄산의 이미지가 너무 좋았다. 헌팅하다가 그런 장소를 발견하면 누구나 꼭 찍고 싶을 것 같다.

나도 그런 생각이 딱 들었다. 원래 최후의 장면은 삼척으로 생각을 했다가, 바로 바꿨다.


Q. 마카로니 웨스턴식의 엔딩이라면 레오네처럼 사막이나 황량한 벌판에서 싸우는 걸 생각하기 마련인데, 석탄 가루가 날리는 것은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의도적으로 비튼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냥 따라하고 계승하고, 그런 걸 할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는 우리의 색깔을 넣은 거다. 석탄이 펄펄 날리는 순간, "이것이 우리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Q. 석탄 연기가 날리는 곳에서 촬영은 힘들지 않나? 보는 것과 다르게 위험할 것 같았다.

맞다. 배우들이 많이 힘들어 했다. 게다가 대부분이 단벌 의상이다. 의상비 여력도 없으니 빨아 입어야 하는데, 석탄이라서 빨래가 너무 힘들었다. 석탄산 결투 장면의 경우는 탁 트인 곳이라 괜찮았는데, 나머지 지역들은 비산 먼지가 날려서 눈앞에 석탄 가루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그래서 더 룩을 좋게 만든 것도 있지만, 숨 쉬는 게 정말 힘들었다. 스탭들은 전부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 배우들은 착용할 수가 없으니 먼지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정말 힘들었을 거다. 배우들이 내색을 30% 정도만 한 것 같다. 항상 너무 힘들었다. 거기서 상처 한 번 나면 이상하게 찝찝한 게 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후반부를 보면 그 동네 물을 생수로 만드는 설정인데, 제작진들이 바쁘다 보니 한, 두 개만 생수를 만들었다. 그 외에는 폐수를 채워 놓은 거다. 그런데 그걸 이무생 배우가 미친 듯이 들이켰다. 그게 광산에서 나오는 진짜 석탄 폐수였다. 다들 놀라고만 있다가 "컷!"하고 뺏었다. 사냥꾼으로 나온 지대한 배우님은 관록이 있어서 바로 뱉었다. 로케이션을 현실적인 이유로 선택한 게 많았다. 독립영화이다 보니 스케줄 문제가 제일 컸다. 반드시 일정 안에 찍어야 했다. 누가 방해를 하면 너무 힘들어지는 상황이었다. 방해 받지 않고 고립된 곳에서 찍기를 원했다. 25일 동안 23회차 촬영을 했다. 근처에 아파트를 하나 빌려서 모두 공동체 생활을 했다.

 

 


Q. 와! 그렇다면 배우들이 착한 거다!

정말 착한 배우들이다. 충격적이었다. 이렇게까지 착할 수 있나? 32평짜리 아파트지만 화장실이 다행히 2개라서, 남녀 분리할 수 있는 구조였다. 일부러 밤 촬영은 안 했다. 나이트 촬영을 안 하는 것이 바람직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무조건 해가 떨어지면 들어왔다. 밥 먹고 술 몇 잔 같이 하고. 그걸로 전부 만족하는, 정말 좋은 분들이었다. 심지어 동네분들도 너무 착하셔서 6회차 촬영을 하니까, 그때야 처음으로 항의가 들어왔다. "우리한테 왜 그러냐!"하면서. 제작팀과 배우들이 대화를 많이 하셔서 잘 푸셨다. 처음엔 관록이 있는 배우들은 모텔에 따로 모시려고 했지만, 본인들이 싫다고 하셨다.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모든 걸 받아주시는 분들과 만나서 행운이다.


Q. 배우 캐스팅은 어떤 과정을 거쳤나?

전부 주먹구구였다. 경우가 다 달랐다. 주인공 무생이 같은 경우, 윤기호 프로듀서가 소개시켜 줬다. <친정엄마>를 무생이와 같이 한 적이 있었다. 선도 그렇고, 굉장히 남성적이라서 이미지에 딱 맞을 거라고 소개를 받아서 같이 하게 됐다. 가장 먼저 내정을 했다. 학봉 역할을 한 오용 배우는 원래 친했다. 이렇게 친한 배우를 몇 명 캐스팅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소개를 받았다.


Q. 귀면를 연기한 윤상화 씨가 제일 궁금하다. 날렵한 느낌에 시라소니 같은 기분이 든다.

특이하시다. 전혀 모르는 배우였다. 오용 형이 갑자기 생각이 났다고 하면서, 사진을 보여주셨다. 웃고 있는데 무척 나빠 보였다. 연극 공연하는데 찾아가서 만났다. 연극은 다양한 역할을 많이 하신다. 여장도 하시고. <이형사님 수사법>에서 수사반장으로 나와서 수사를 한 적이 있다. 상황이 황당한 일본식 코미디였다. 용의자들을 불러 놓고는 혼란에 빠트려서는 난장판을 만든다. 나중에 알고 보면 모든 과정이 허를 찌르는 수사법이란 게 밝혀진다. 그 안에서 여장도 하시고, 다양한 역할을 보여주시는데, 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래서 다음에는 꼭 코미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그게 아닌데>라는 연극을 준비중이시다. 코끼리 조련사로 나온다. 자신이 관리하던 코끼리가 도망쳐서 어느 국회위원의 유세장을 난장판으로 만든다. 그것 때문에 끌려가서 안기부 사람들에게 고초를 겪는다. 정신 감정도 받는데, 본인은 계속 "그게 아닌데!"라고 말하는 이야기다. 이 분의 말투에 허전한 게 있다. 사람들이 달 떠 있는 분위기에서 이 분이 한마디 하면 싹 가라앉는 느낌이 있다. 그거에서 난 귀면의 모습을 봤다. 실제로는 코믹한 부분이 더 크더라. 알면 알수록.



영화는 공유할 수 있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Q. 어떤 감독을 좋아하나? 영향 받은 영화는?

로드리게즈 감독을 무척 좋아한다. 일단 데뷔한 것도 드라마틱하다고 알고 있다가, <플래닛 테러>(2007)를 보고 더 좋아졌다. 이런 게 진짜 내가 원했던 영화다. 내가 개인적인 강렬한 경험이 있거나. 세상 사람들이 잘 생각하지 못 하는 것들을 메시지로 전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Q. 감독이 되기 위해선 비극적 트라우마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웃음)

그렇다. 난 너무 좋아하는 영화들이 있는데, 그걸 내가 해보고 싶었다. 그런 맥락에서 로드리게즈는 영화적인 장난을 너무 좋아하는 악동이다. 그걸 정말 가감 없이 할리우드의 변방에서 하는데, 국제적으로 그걸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고. 어느 날 영화학교 졸업한지 3년이 지났는데 영화를 못 찍고 있으니까, 너무 답답해서 의식적으로 그 책을 찾아봤다. 데뷔작 <엘 마리아치>를 7천 달러로 찍게 된 과정이다. 그걸 보니, 내가 단편 영화 찍은 돈으로 장편을 찍은 거다. 단편을 작품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걸 알고는 있지만, 나한테는 습작이었다. 영화학교를 다니니까 단편을 찍은 거지, 옛날부터 내가 보던 영화는 전부 스토리가 있는 장편을 좋아했다. 그래서 길을 잘 못 들었다는 생각까지 했다. 이게 아니구나! 영화를 무조건 찍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정하고서 따라했다. 워낙 책이 단정조로 "너,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뭐는 하지 마라" 식으로, 족집게다. 내가 이 사람을 스승 삼기로 한 이상,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되더라. (웃음) 로드리게즈는 모든 게 준비되어서 자연스럽게 한 사람이다. 난 영화학교 4년을 다녔음에도 그런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현장에서 헤매고, 제작하는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이 너무 많았고. 해보니까 알겠더라. 사실은 딜레마가 있었다. 내 목적은 감독이 되기 위한 스스로의 자질을 세상에 있는 그대로 평가받고 싶은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이렇게 많은 배우들이 나와도 되는 건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내 목적의식과는 너무 안 맞더라. 액션 신도 있어야 하고. 그러면서 갈등이 많았다. 영화를 만들면서는 그런 개인적인 목적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목적은 있어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양립하면서 갔다. 개인적인 훈련, 재미있는 B급 서부영화 만들기, 두 가지 목적의식을 동시에 갖고 갔다. 정말 뼛속까지 쿨하게 혼자서 해보지는 못했다.


Q. 두 가지 목적의식에 맞춰 스스로 평가를 내리자면?

개인적인 목적에는 충분히 부합을 했다. 이걸 안 했으면 내가 어떤 사람인가, 상업영화 감독으로써 대중과 어떤 식으로 교류를 할 수 있는가, 그런 조건을 뼛속까지 고민할 수 없었다. 이게 없는 내 인생은 생각할 수가 없다. 내 인생에서 필연적인 부분이었다. 그런 기회였다! 정말 재미있는 B급 장르를 찍어보자는 목적으로는 70점 정도다. 그랬던 것 같다.(웃음)


Q. 극장 개봉은 영화제와 다르다. 티켓을 사는 관객의 평가는 냉정하다. 돈을 내는 관객의 욕망을 만족시켜야 하는 일이다. 그것은 또 다른 경험이다.

영화제 관객은 관대하다! 개봉은 다르다. 정말 무섭다. 6월에는 잠이 안 오고 그랬는데, 지금은 괜찮다. 그 경험 자체가 안 해보면 모르는 거다. 정말 신기하다. 창작자로써 이야기를 구성하고 만든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창작자가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관객들의 냉정한 평가를 받고, 내가 지금껏 접점이 없었던 곳에 코드를 꼽아 보는 거라서, 어떻게 보면 여기서 얻는 게 더 클 수도 있다. 이런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서 비판이라도 받는 게 더 괜찮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보면 김태우 씨가 영화감독으로 나오는데, 누군가에게 "감독님 영화를 보면 사람의 성격의 밑바탕까지 볼 수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모텔에서 자면서 되뇌는 장면이 있다. 그게 완전 이해가 가더라.


Q.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코미디를 해도 잘 할 것 같다.

난 어떤 대상이 편해져야 웃음이 나온다. 그건 영화가 아직도 편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웃긴 게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는데... 나도 웃길 수 있다는 생각이 요즘은 조금씩 든다. 단편을 보면 알겠지만, 예전부터 내 영화에 웃음이 없다.


Q. 유에프오필름 사이트(www.youefo.com)에서 단편 <늪 속의 괴물>(2007), <타데오 신부님>(2006)을 봤다. 호러나 액션 장르보다는 다분히 예술 취향의 영화였다.(웃음)

그게 학교 다닐 때 찍은 거라, 성향이 반반이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들을 실험해 보고 싶은 것과 반대로 대중적이고 싶은 마음에 호러를 선택했다. 그게 조화롭지 않았던 거다. <타데오 신부님>보다 <늪 속의 괴물>이 좀 더 조화로웠다. <타데오 신부님>은 괴작이다. 굉장히 괴상한 영화다. 지금 만들었으면 정말 잘 만들었을 거다. <늪 속의 괴물>은 샴쌍둥이에 대한 이야기다. 쌍둥이가 붙어 있어서 한 명만 살린다는 설정이다. 죄의식은 부모가 아니라 아이 본인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습작은 습작의 미덕이 있다고 본다. 그 당시에는, 서둘러 빨리,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을 하는 시간들이었다.


Q. 계속 촬영은 지승우 촬영감독이 맡고 있다. 이름만 들으면 가족 같은데?

이번 영화에서는 투자 지승우라고 크레딧이 나온다. 다들 아버지라고 생각한다. 보통 독립영화가 가족시네마인 경우가 많으니까. 그냥 학교 친구다. 입학 동기다. 학교 다닐 때는 촬영으로 많이 도와줬는데, 이번에는 제작자로써 역량을 많이 발휘했다. 나와 똑같이 공동 투자했다. 반반! 우리는 잘 안 된다고 찢어지는 그런 관계는 아니다.


Q. 궁극적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나? 준비 중인 영화는 있나?

일단 강원도 웨스턴을 표방했지만, 웨스턴 장르를 정말 좋아한다. 웨스턴은 예전에는 장르였지만, 지금은 스타일이 되어 좋은 영화들로 계승이 됐다. 그런 의미에서 좀 더 상업적으로 잘 계승한 웨스턴을 꼭 만들고 싶다. 내가 구상하고 있는 영화 중에는 이런 스타일이 많다. 꼭 복수극이 아니더라도. <와일드 번치>(1969)처럼 범죄자들이 도망가면서 이것만 털고 가자고 했다가, 그것이 그들의 무덤이 되는 이야기! 이것도 웨스턴의 한줄기다. 이런 영화 꼭 만들고 싶다. 멜로 외에는 잡다한 장르 영화는 다 도전하고 싶다. 차기작으로는 유머러스한 코드가 많이 들어간 호러 액션을 하고 싶다. 시나리오가 나온 게 아니라, 아직 잘 모르겠다. 굉장히 특이한 존재들이 나오긴 할 텐데, 그게 좀비가 될지는 모르겠다.


Q. 좀비들이 나오는 호러가 국내에선 아직까지 마니아 취향의 영화다. 대중적이지 않다.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호러는 처음부터 관객층이 제한이 된다. 서양과 동양의 호러가 굉장히 다르다. 내가 좋아하는 건 서스펜스다. 극도의 긴장감을 주는 게 좋다. 영화 보는 관객들을 바늘로 찌르면 빵 터져버릴 것 같은 긴장감! 그런 걸 표현하기 좋은 장르가 호러다. 그런 의미에서 호러를 하고 싶다. 캐릭터들이 어떤 극단적인 상황에 몰렸을 때 본인들의 성격이 나오면서 대립하는 게 좋다. 감수성이 B급스러운 것은 있는데, 그걸 서스펜스나 스릴러의 범주 내에서 대중적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크다. 장르 자체가 B급이지, 만듦새는 그렇지 않다. 대중적인 즐길 거리가 많은 걸 원한다.


Q. 할리우드는 다양한 장르가 혼합되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국내에 넘어오면 이상하게 표현이 되는 것 같다.

짬뽕? B급이 '저급'이 되는 경우가 있다. <철암계곡의 혈투>의 경우는, 내가 힘이 들 빠져 있어서, 마음먹고 못한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중간에 투코 패밀리라고 이상한 악당들이 나온다. 갑자기 나와서 정말 허무하게 죽는다. 하는 짓도 좀 이상하다. 이들이 로프로 땅에 파서 묻고 하는 것까지 다 찍었다. 웃겨 보이라고. 곡괭이질 하고 묻는 후에, 철기가 오토바이 타고 오면 당겨서 넘어트린다. 철기를 로프로 묶어서 끌고 다니는 것이 좀 웃긴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허무하게 죽어버린다. 로드리게즈의 <데스페라도>(1995)보면 그런 코드들이 좀 있다. 중간에 친구들이 도와주러 나와서 허무하게 죽어버린다. 안토니오 반데라스는 기타가 총인데, 다른 친구들은 바주카포이기도 하다. 영화를 찍는 동안에는 의식을 못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데스페라도>였다. 좀 더 웃겼으면 그들이 사라졌다고 바로 사라지는 의미를 더 명확하게 전달했을 텐데, 그런 걸 못 했다는 생각이 든다. <철암계곡의 혈투>의 곳곳에도 그런 코드들이 좀 있다. 귀면이 동자승 죽이는 장면에서, 일부 관객들 중에는 "살릴 것처럼 해 놓고는 왜 죽이냐?"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 그게 내겐 굉장히 영화적인 거다. 현실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린 동자승을 절대 못 죽인다. 이게 굉장히 현실이라고 감정이입하고 만든 상태라면. 어떻게 보면 그것도 약간의 개그이기도 하다. 그걸 갖고 몇 가지 장면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해보는 거다. 귀면이 쫓아갈 때는 긴박하게 했다가, 음악이 멈추고 수풀 소리만 들리고, 조용해지면서 어린 동자승은 숨어 있다. 귀면은 수풀을 헤치면서 나간다. 그런 식으로 완급이 조정이 됐을 때 긴장감이라든지.


Q. 개인적으로는 그 장면은 고바야시 마사키의 사무라이 영화 같았다. 갈대밭 사이에서 숨었다가 싸우는 장면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구로자와 아키라 영화에서도 그런 게 나온다. 알드리치의 <아파치>(1954)에도 비슷한 장면이 하나 나온다. 옥수수밭에서 늙은 총잡이와 아파치 족 전사 마사이가 대결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둘 다 약간 짐승들이다. 버트 랭카스터가 거꾸로 걸으면서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걸 보면서, 정말 짐승들의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Q. 그런 걸 알아보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겠나? 사실 알아보지 못해도 상관은 없겠지?

상관없다. 동시에 가는 것 같다. 이렇게 실험을 하면서도 영화의 맥락상 튀지 않게 해야 한다. 스토리를 저해하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직접 안 해보면 본인이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를 수도 있다. 현장에서 확실히 느낀 것은 추격 신을 찍는 장면에서 완전히 넋이 나갔다. 그걸 무한정 찍고 있는 거다. 일정을 관리하는 연출부가 있는 게 아니니까, 정신 차려보면 2시간 찍고 넘어가야 할 것은 4시간째 찍고 있는 거다. 추격 신이 2정도 필요한데 10을 찍어놓은 거다. 그래서 8을 덜어낸 신이 너무 많았다.(웃음) 그래서 내가 추격 신을 정말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찍을 때도 너무 재밌다.


Q. 오래전 최동훈 감독과 인터뷰를 했더니, <범죄의 재구성>, <타짜>를 찍을 때 추격 신이 너무 재미있다고 한 적이 있다. 그런 기쁨을 느낀 것 같다!

무슨 의미인줄 알 것 같다. 편집 때도 사실 재미있긴 하다. 늘렸다가 줄였다가.


Q. <철암계곡의 혈투>를 단순히 마카로니 웨스턴의 복원이 아니라 다른 액션 영화들에 대한 오마주로 봤다. 보통은 세르지오 레오네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을 것 같다.

주인공이 도끼와 싸우는 데, 줄을 잡아당겨서 죽인다. 이런 유사한 장면을 어느 영화에서 봤는데, 무슨 작품이었는지 아직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사람들이 잘 물어보질 않는데, 내가 가장 신경 쓴 것이 있다. 작두, 도끼, 귀면이 차례로 죽는 것이 중요했다. 이들의 완급도 신경을 썼다. 작두는 사람들이 인식을 못해서 "뭐지?" 하는 순간에 죽이고, 귀면보다도 훨씬 더 고생스럽게 도끼를 죽인다. 귀면은 확 트인 공간에서 매너있게 죽인다. 그거 신경을 많이 쓴 거다작두는 화염방사기로 사람을 죽였으니까 불로 죽인다. 도끼는 부족에 집착하는 친구다. 자기가 나쁜 일을 한 곳에서 뭘 훔쳐 와야, 그게 자기를 지켜준다고 믿는다. 불상이 자기를 지켜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것 때문에 죽는다. 귀면은 칼을 놓고 서양식 결투를 흉내 내며 상대방을 놀린다. 그러니까 귀면도 똑같은 방식으로 죽는다. 그런 우화적인 컨셉트를 갖고 있다. 누가 알아봐 줄지는 모르겠지만.


Q. <철암계곡의 혈투>도 컨벤션과 새로움의 경계를 묻게 된다.

기존의 영화들을 보면 수십 편을 섞어놓은 경우가 있다. 이건 내가 보기에도 재미있는 영화들이 나온다. 아니면 그런 느낌과 스타일만을 갖고 자기 색깔을 정확하게 지키거나. 보통 둘 중에 하나인 것 같다. 사람은 의도하지 않아도 자기 색깔이 나온다. 그걸 잘 찾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정통 장르를 계승하면서도 색깔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Q. 그렇다면 어떤 시스템으로 작업을 할 것인가도 고민해야 한다.

난 다작을 하고 싶다. 잘 짜여진 틀 안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시스템이다. 한국에서는 판의 크기가 있다 보니, 그렇게 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개인적으로 내 영화를 작동하는 시스템을 발견해서, 가능한 많이 찍고 싶다. 힘 빼고 유머러스한 영화들을 내놓다가 간간히 야심작을 만들고 싶다. 그게 가장 이상적이다. 4, 5년 간격으로 영화를 찍으면 만들면서 성장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계속 영화를 찍으면서 살고 싶다.


Q. 감독들은 흔히 "현장에 있을 때만 감독이고, 그 외에는 백수"라고 말한다. 그만큼 많은 현장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

공감한다. 스탭들은 내가 잠이 없는 사람인 줄 안다. 사실 난 잠도 많다. 그게 강박 때문에 안 잔 게 아니라 신나서 그랬다. 2시간만 자면 바로 눈이 떠진다. 현장에 제일 먼저 달려가 세팅될 때까지 혼자 2시간을 기다리고 그랬다. 사실 숙소에서 기다려도 되는데. 그런데 학교 다닐 때는 그런 재미를 전혀 몰랐다. 그때는 야심밖에 없었다. 나의 야심과 스타일을 고스란히 녹여내기 위해서 참고 견뎌야 한다. 솔직히 그런 느낌이 컸다. 허나 <철암계곡의 혈투>를 찍으면서 영화 현장이 너무 즐겁고, 만드는 게 재미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영화를 찍을 때는 예술에 대한 느낌은 다 버리고 찍었다. 이런 즐거움을 이미 느껴서 영화를 안 하면 앞으로 힘들어 질 거 같다. 이번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영화를 계속 만들 거다.


Q.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마약이다. 이 인터뷰를 읽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철암계곡의 혈투>는 올여름 한국 개봉작 중에 유일한 액션 영화다. 장르의 다양성이 보장되어야 관객들이 즐길 수 있는 영화가 많아진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부족함이 있더라도 이 영화를 선택해 주셨으면 좋겠다. 국내 독립영화에서도 이런 오락 영화는 시도를 잘 하진 않는다. 한국에선 보기 드문 시도다. 100% 스타일이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내 능력 내에서 최대한 노력했다. 엉성한 점은 비판도 해주시고, 장점을 찾아주시면 좋겠다. 이 영화는 어렵지 않다. 힘줘서 사람들한테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가 아니다. 액션 신이나 로케이션을 즐기는 영화다. 귀엽게 봐 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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