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태블릿PC 등의 유행으로 전자책 ‘e북’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편리한 한편 책장을 넘기는 손맛이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종이책이 구식으로 받아들여지는 변화의 시대에 전통의 방식을 따라 ‘단 하나뿐인 책’을 만드는 이들이 있다. 예술제본가다. 예술제본이란 프랑스어 Reliure D'Art를 직역한 말로 유럽식 전통제본을 뜻한다. 우리나라에 예술제본이 처음으로 뿌리내린 건 1999년, 故 백순덕 씨가 프랑스 파리에서 8년간 예술제본을 공부한 뒤 홍대 앞에 공방 ‘렉또베르쏘’를 차리고 나서부터였다. 국내의 유일한 예술제본 전문학교를 지향하는 렉또베르쏘는 현재 그의 수제자 조효은 씨가 운영하고 있다. 예술제본가 조효은 씨를 만나 생소하지만 매력적인 직업, 예술제본가에 대해 들어보았다. 예술제본가, 책을 위한 노력을 하나로 엮는 사람
▲ 서양에선 제본을 건축에 비유하기도 한다. 하나하나 구조를 쌓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 유은수
Q 예술제본을 처음 접한 독자들을 위해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예술제본의 목적은 책을 견고하게 만들어 오래 보존케 하는 데 있다. 책을 처음 만들 때부터 예술제본을 하기도 하고, 기존의 책을 분해·보수하는 작업을 거쳐 다시 제본하는 경우도 있다. 예술제본은 기계 제본과 구분하여 전통적 수제본을 부르는 말이다. 제본이 기계화되면서 옛날 방식 그대로 손으로 하는 정교하고 복잡한 과정이 귀한 것이 되었다.
Q 북아트와 예술제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북아트는 ‘아트’에 중점을 두고 책이 오브제objet가 된다. 책이 꼭 평범한 네모 모양일 필요도, 재료가 종이일 필요도 없다. 책이 주제나 소재가 되는 모든 작업, 그림이나 조각 등을 북아트라고 한다. 그리고 작품의 구성부터 작가가 책임진다. 예술제본은 예술보다 제본에 방점이 찍혀있다. 그리고 기술자적인 작업이 기본이고, 그 위에 추가적으로 예술적인 감성이나 창의성을 가미하는 것이다. 북아트는 책으로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고 제본가의 목적은 책의 수명을 늘리는 데 있다. ▲ 제본에는 크고 작은 도구 50여개가 이용된다. 책을 고정하는 고정틀과 책 표지를 싸는 가죽들. ⓒ 유은수
Q 예술제본을 직업으로 선택한 이유는? 2001년 TV에서 예술제본에 대해 스치듯 봤는데, 보는 순간 이 일이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예술제본은 책을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랜 시간과 정성을 책에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책과 손으로 뭔가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성향에 맞았다. 비록 전망이 좋거나 주목받는 일은 아니지만 평생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에 예술제본을 하게 되었다.
Q 예술제본의 매력을 꼽자면?
책에 담긴 내용도 좋지만 책의 물성(物性)을 좋아한다. 책방에 꽂혀있는 책들을 보면 기분이 좋다. 제본가의 역할은 그 책을 만들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엮어주는 것이다. 책의 작가, 삽화가, 편집자부터 더 내려가 종이를 만든 사람, 식자공의 노력들이 제본가의 손끝에서 책 한권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매력이다. 그렇게 내 손에서 만들어진 책이 긴 수명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전달되어 특별한 책이 된다는 데에 기쁨을 느낀다.
예술제본 과정
예술제본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유럽식 전통제본인 고전 1/2제본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제본할 책을 낱장으로 분해·보수하고, 기존의 표지를 연결하는 등의 본문 정리 작업(몽타주)을 한다.
2. 2~3일 동안 프레스로 눌러 책의 부피를 압축하고 재단기로 가장자리 잘라 정리한다.
3. 조합기에 넣어 책등에 톱질해 홈을 내고, 수틀에 연결하여 책을 꿰맨다.
4. 바이스와 망치를 이용해 책등을 둥글리고, 판지에 구멍을 뚫어 책과 판지를 연결한다.
5. 여러 가지 색 실을 골라 헤드밴드(꽃천)를 만든다.
6. 약 1시간 동안 표지를 사포로 갈아낸다.
7. 표지를 쌀 가죽의 원하는 부분을 얇게 갈아준다. 약 일주일 소요된다.]
8. 집게를 이용하여 책등을 가죽으로 싸고, 마블지로 표지를 장식해 장정한다.
9. 표지 안쪽에 면지를 붙인다.
간단한 제본은 하루 이틀 걸리기도 하지만 위와 같이 전통 방식은 최소 한 달에서 한 달 반이 소요된다. 간혹 시간을 촉박하게 잡고 ‘돈을 더 낼 테니 빨리 해달라’고 하는 고객도 있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Q 예술제본을 제대로 배우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
초급은 8주 과정인데 전문적인 도구나 재료 없이 칼, 가위 등으로 쉽게 할 수 있는 제본을 배운다. 중급부터 전문적인 과정이 시작되는데 약 2년을 잡고 해야 한다. 기술적 숙련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본이 되는 전통제본 몇 가지를 배운 뒤 계속 반복한다. 그리고 혼자 힘으로 제본을 완성할 수 있으면 고급 과정으로 진급할 수 있다. 고급에서는 책 표지에 쓰이는 금박, 모자이크 등 디테일한 장식 기법들을 배운다. 고급은 정해놓은 기간이 없기 때문에 따로 공방을 차려 나간 분들도 정기적으로 함께 수업한다. 제본은 안 해본 게 계속 있을 수밖에 없어 배우는 데 끝이 없다.
예술제본은 빨리 배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보통 일주일에 한번 수업이 있는데 빨리 터득하고 싶다고 일주일에 세 번을 오는 분들이 간혹 있다. 그런데 세 번을 배운다고 실력이 세배로 빨리 늘지는 않더라. 기술을 배워서 소화시키는 절대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다. 요즘 시대와는 안 맞는 느린 템포로 진행된다. 따로 공방을 차린 분들도 다들 5~6년은 배웠다.
Q 한국에 ‘예술제본가’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다른 곳에서 다양한 방식의 제본을 배울 수 있지만, 유럽식 전통제본을 기준으로 따지면 15명 정도가 될 것 같다. 고급과정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 제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이 되는 분들이다.
▲ 책을 꿰매는 작업을 하고 있는 예술제본가 조효은 씨. ⓒ 유은수
오래 남길 소중하고 특별한 책 한 권을 위하여
Q 희소한 직업인데 힘든 점은 없나.
종이, 가죽을 주로 쓰니까 먼지가 많아 기관지가 안 좋을 수 있고, 요즘엔 팔이 좀 아프다. (웃음) 그보다 실내에 틀어박혀 하는 일이기 때문에 외향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게 별로 없다. 그래서 혼자 조용히 뭔가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배우러 온다. 제일 힘든 점은 내 직업에 대해 일일이 설명해줘야 하는 건 물론, 왜 그런 일을 하느냐는 얘기도 종종 듣는다. 사람들이 예술제본의 가치를 몰라주면 조금 섭섭하기도 하다. 돈이 최고의 가치는 아닌데 말이다.
Q 반대로 예술제본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는?
반대로 이 일의 가치를 알아줄 때다. 책 한 권을 만드는 데 몇 십만 원이 든다고 하면 한국 사람은 대부분 놀란다. 그런데 이 작업과정을 알고 있는 분들은 더 받아야 되지 않느냐고 얘기한다. 그만큼 얼마나 손이 많이 가고 정성이 들어가는지 알기 때문이다.
Q 기억에 남는 책을 꼽자면?
책 자체보다 책을 주문한 분의 마인드가 기억에 남는다. 괴테의 <파우스트> 초판본을 가지고 온 노신사가 있었다. 독일에서 구입한 괴테 전집 중 한 권이었다. 전집 전부가 아니라 한 권만 새로 제본하게 되면 전집의 경제적 가치는 떨어지는데 괜찮겠냐고 말씀드렸다. 그분은 책을 되팔기 위해 산 게 아니라 좋아해서 샀고, 그중 <파우스트>는 지금부터라도 매일 봐야 하는 책이기 때문에 정말 견고하게 다시 만들고 싶다고 하셨다. 예술제본이 어떤 일인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작업 과정에도 일일이 관여하셨다. 가죽 종류와 색까지 일일이 정해줬는데, 일하는 입장에서 번거롭긴 했어도 기분은 좋았다. 내 맘대로 하고 돈만 받고 끝낼 수도 있지만 이 일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예술제본으로 완성된 책들. ⓒ 유은수
Q 주문을 거절하는 경우도 있나?
제본가가 손을 대면 구조가 더 안 좋아지거나 수명이 줄어들 만한 책이 있다. 작업하려면 할 수 있지만, 그럴 땐 손을 대지 않는다. 간혹 책의 표지만 바꿔달라고 하는 고객도 있다. 표지만 바꾸는 작업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하면 겉보기에는 좋아보일지 몰라도 책의 구조에는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후에 책의 견고함이 더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 주문이 들어와도 거절한다.
Q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육체적으로도 힘든 일인 것 같다. 예술제본을 배우고 싶은 분들에게 당부 한 마디.
직업으로 예술제본가를 하고 싶다고 공방을 찾아오는 분들께 항상 하는 말은 조금 더 경험해보고 결정하라는 것이다. 처음에 예술제본을 하고 싶은 의지가 아무리 커도 막상 해봐야 자신에게 맞는지 알 수 있다. 한 3개월만 해보면 계속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알게 된다. 그래서 항상 미리 결정하지 말고 배워보고 결정하라고 얘기한다.
배우기 시작한 분들에게는 욕심을 내지 말고 천천히 제대로 하라고 말한다. 마음을 급하게 먹으면 꼭 실수를 하게 되더라. 짧은 시간에 얼마만큼 해야지 조바심을 내면 더 안 되는 일이다. 효율과 속도를 중요시하는 요즘 세상의 가치와는 안 맞을 수도 있다. 건축과 비교될 정도로 하나하나 구조를 쌓아 올라가는 일이다. 앞에 어떤 과정을 빼먹거나 대충 하면 그 다음에 언젠가는 꼭 티가 난다. 인내를 갖고, 천천히 하고, 하나를 해도 제대로 하고 넘어가라는 점을 항상 강조한다.
예술제본은 느리고 힘들고 번거롭다. 하지만 오래 두고 간직하고픈 ‘인생의 책 한 권’이 있는 사람에겐 무척이나 긴요한 일이다. 빨리, 많이, 효율만을 외치는 시대에 전통과 정성, 유일의 가치를 간직한 예술제본이 반갑게 느껴진다.
예술제본 공방 렉또베르쏘 ▶ http://www.rectovers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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